두 세상을 넘나들며
법무행정학과 3학년 김병문
군인과 학생 사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군대에 간 나로선 대학은 그저 로망이었다. 집안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부모님을 위해 했던 선택에 스스로 떳떳했지만 콤플렉
스는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이야 직업군인 중 대학생이 아닌 사람을 찾기가 힘들어 오
히려 학력이 발언권이나 진급을 좌우하진 않지만 내가 군에 들어 온 87년만 해도 학
력은 군 생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군대에서도 학업을 계속할 수 있는 제도들
을 많이 봐 왔다. 하지만 전후방을 번갈아가며 전출을 직업적 특성 상 근무 외의 일에
집중하기는 힘들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정신없던 공직생활 30년 후, 수도
방위사령부 헌병단 수사팀장으로 서울에 자리를 잡았다. 서울은 군생활의 마무리 지역으로 다시 전출을 갈 가능성은 낮았다. 즉 여유가 생긴 것이다. 대학 생각부터 난 건
그 때 즈음이었다.
군인들이 범법행위를 하면 수사에 나서고 조사를 하는 게 나의 일이다. 서울에 생기
는 모든 사건을 조사하다보니 온갖 사건을 다 다뤄왔다. 그런데 그렇게 수사를 하다보
면 법을 따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법률적인 검토를 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경력이 몇 년이며 얼마나 사건을 많이 다뤄 온 배태랑 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건
경험이 아닌 법률적 지식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젊은 수사장교들은 거의 다 법대
출신이었고 경험은 나보다 부족하지만 이론적으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나의 콤플렉스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내 말보다는 그들의 말이 설득력 있게 들리는 것이 항
상 마음에 걸렸다.
더 배워야 하는 게 맞았다. 이건 가족들의 의견도 마찬가지였다. 내 밥줄은 군형법
이었고 그 다음이 형법이었다. 명지대 법무정책학과는 적절한 선택이었다.
내려놓기
대학에 다니며 제일 먼저 느꼈던 건 신분의 괴리였다. 군인과 학생은 정 반대의 존
재다. 조직의 위계와 임무 아래 군인이 있다면 학생은 개인적이며 자유롭다.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다 보니 나 스스로도 헷갈릴 때가 많았다. 자유를 넘어선 것처럼
보이는 젊은 친구들의 행동들이 마뜩치 않아 실제로 훈계를 한 적까지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이야기를 나누니 그들의 그런 행동들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란 걸 알게 되
었다. 학교는 군대가 아니었고 나는 대학 초년생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변하고, 내가
적응을 하는 게 맞았다. 신세대가 있고 구세대가 있다면 구세대가 맞춰가는 것이 당연
하지 않은가. 물론 가치관을 바꾸는 게, 혹은 두 가치관을 동시에 갖추고 살아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역시 내가 해내야 할 대학생활의 일부였다.
군인으로서의 나를 조금 내려놓으니 친구들이 많이 생겼다. 나이와 직업을 불문하
고 이야기를 나눠보면 군대에서는 겪을 수 없었던 소통과 공감을 경험하기도 했다. 여
학우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아내를 이해하게 되고 젊은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내
아이들을 이해하게 되는 식이었다. 또한 늦게 공부를 하는 학생으로서의 공감대는 공
부를 계속 해 나가는 데에 적잖은 힘이 되었다. 하지만 지켜야 할 어른의 역할을 잊은
건 아니다. 나는 훈장님 대신 삼촌의 노릇을 하기로 했다. 축제 때 아이들이 대하기 어
려운 교수님을 모시고 주점에 간다던가 부족한 축제 준비 자금을 보태주며 격려 하는
식이다. 나는 지금도 어른과 동료 사이의 길을 계속 나아가는 중이다.
대학에 왔구나
직업 특성 상 수사팀은 정해진 휴일이 없다. 매일 일을 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고가
생기면 언제가 되었건 출동해야 한다. 사회에서의 형사의 역할을 군대에서 한다고 보
면 된다. 그런 면에서 학교를 다니며 곤란한 일들이 많았다. 수요일 오후의 전투체육
후엔 곧잘 회식을 하는데, 학교 때문에 그걸 빠지기가 민망했다. 지휘관님이 이해해
주셔서 망정이지 나로선 참 난감한 날들이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토요일이었다.
군인들의 휴가나 외박이 토요일이 많기 때문에 사단이 나도 꼭 그 때 나기 마련이었
다. 경찰까지 출동한 상태라면 팀장인 나는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학교를 몇 번
빠져야 했다. 어쩔 때는 학교에 가려고 지하철을 타는 순간에 군에서 전화가 걸려 와
발길을 돌린 적도 있었다. 그 순간의 씁쓸함은 이로 말할 수 없지만 결국 내가 감당해
야 하는 문제였다. 그럴 때마다 정신을 차리고 경찰서, 현장, 부대에서의 조사와 검증
을 다 마친 후에 늦게라도 학교에 왔다. 이해해주신 교수님들께 감사할 따름이다.
이젠 내 책상에 각종 법학 책이 언제나 쌓여 있다. 예전엔 사건을 주로 경험으로 해
결하려 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지금은 적용법과 해석을 확인 한 후 사건은 다룬
다. 법전을 머리에 다 넣을 순 없지만 책을 확인해서 객관적인 자료를 제시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 내 발언에 힘이 실려 일하기에도 수월하다.
행정서류에 올라와 있는 내 학력도 몇 년 전에는 ‘고졸’이었던 것이 지금은 ‘재학 중’
으로 되어 있다. 그 덕인지 작년 2016년도에는 상사에서 원사로 진급에 성공했다. 하
지만 뭐니뭐니 해도 가장 좋은 점은 내가 ‘대학생’이라는 점이다. 토요일에 가방을 메
고 공동아파트에서 나오다 보면 왠지 쑥스럽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