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수영을 위해 필요한 것들
법무행정학과 3학년 한기수
뿌리를 알지 못하면
무슨 나무인지 알지 못한다
공무원이 철밥통이라고 하지만 정년까지 5년이 남았던 즈음, 앞으로 남은 여생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했다. 때마침 본 게 명지대 모집요강 공문이었다. 예전부터
공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알아본 몇몇 학교들은 그닥 마음에 차지 않았
다. 동영상 강의를 보면서 학점만 채우면서 학위를 따고 싶지는 않았다. 시험이나 레
포트, 영어 시험 등 불길하고 어려운 일들이 첩첩산중이었지만, 딸과 아들의 지지에
용기를 얻어 원서를 접수했다. 처음에는 사회복지학과를 염두에 두었지만, 이내 법무
정책학과로 선회하게 되었다. 십년 가량 신앙 생활을 꾸준히 하면서 저능아 학생들을
돕는 봉사 활동도 칠년 이상 병행한지라 아무래도 사회복지학과가 더 낫지 않겠나 싶
었다. 하지만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늘 품고 있던 의문이 있었다. 공무원은 나라의 녹
을 먹는 사람들이고, 상사나 상위 기관에서 시행령을 내리면 어떤 이의나 토도 달지
못하고 따라야 한다. 어떤 법과 제도인지 모르는 이상, 제대로 시행하기도 힘들 뿐더
러 돌발 상황이 생기면 대처할 수도 없게 마련이다. 수차례 품어온 의문을 해소하고
싶었기 때문에 법무정책학과로의 진학을 선택하게 되었다.
일과 학업을 병행한다는 건, 일하는 곳의 양해가 없다면 불가능하다. 서울시의 경우
에는 유연 근무가 있었지만, 예전에는 왠지 눈치를 보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유연근
무제가 하나의 상식이 되면서, 지금은 수요일에 대학원 수업에 참석하기 위해 나가도별 어려움이 없다. 게다가 공무원들의 학업
을 장려한다는 이유로 등록금의 반 이상을 지
원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보여주기 식의 복지
라고 생각했지만, 이후 공무원들의 자기계발
이야말로 나라를 굳건하게 하는 힘이라는 생
각이 들었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법치 국가
다. 그 기반인 법과 제도를 모른다면 사실상
이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게 된다.
우리가 어떤 나무를 가장 높고 튼튼한 나무로
가꾸고 싶다면,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부터
알아야 할 것이다.
여러 물줄기가 모여 이루는 강
학교는 강의만 듣는 곳이 아니었다. 온라인 강의였다면 교수님들은 컴퓨터 화면 너
머에서 자신의 할 말만 하고 사라졌을 테지만, 학교에서는 달랐다. 수동적으로 듣는
대신 적극적으로 나서서 발표를 하고 레포트를 써야 했다. 민주주의 모델이라는 개념
도, 배우기 직전까지는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라는 것만 알고 있는 게 다였다. 현
민주주의의 조상 격인 고대 아테네는 정치를 사생활의 영역으로 종속시켰고, 사람들
은 누구든 자신과 타인을 위한 공동선에 따라 공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시민이 주
인이 되는 시작이었던 셈이다. 민주주의의 역사는 이내 지금 현대 사회에서 민주주의
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돌이켜 생각해 보는 계기를 주기도 했다. 나는 정치 역
시 여당과 야당만 있다고 생각했고, 가끔은 혼동하기 일쑤였다. 마침 교수님이 대선
주자들에 대해 조사를 해오라고 내신 숙제를 계기로 출구 조사와 대선 후보들이 나오
는 방송을 관심있게 지켜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더 많은 정당과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제안하는 법의 발의와 폐기에 대한 논의들은 다채로웠다. 광화문 광장에서 마주한 수많은 깃발들 역시 놀라울
따름이었다. 다들 다른 깃발을 들
고 있지만, 같이 가기 위해 서로를
배려하면서 함께 움직인다. 이전
에는 거대한 강만 보면서 정치란
속도 알 수 없을 만큼 까마득하기
만 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은 거대한 강을 향해 흘러오는 여
러 물줄기들을 볼 수 되었다. 아마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
다. 내가 다원주의로 나아가는 물
줄기들을 바라보고 있다고, 이 역
사적 전환의 지점에 서 있다는 걸.
용기라는 것
뒤늦게 공부를 하기로 마음 먹었을 때, 혹여 누가 주책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싶어
새삼 걱정하기도 했다. 동년배의 친구들도, 나보다 한참 어린 동기들도 멀게만 느껴
졌다. 하지만 내 가치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무엇이 부끄럽겠는가, 하지도 않
고 안온하게 있는 것보다는 최선을 다해 꾸준히 시도하는 게 나중에라도 후회하지 않
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동기들이 모여 있는 채팅방에서 먼저 인사 한 줄 남길 때도, 회
장을 맡았을 때도 용기를 냈다. 무엇이든 문을 열어야 시작되듯, 내가 마음을 열고 다
가서자 사람들 역시 하나둘씩 내게 다가왔다. 나이가 적든 많든 함께 노력하는 처지라
고 생각하다 보니 뭘 모른다는 것도 부끄럽게 여겨지지 않았다. 우리는 배우려고 온
것이지, 자랑하러 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 딸이나 아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걸 마냥
부끄럽다고 생각했다면 아마 내 영어 성적은 처참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어떻게 도와야 할지 막막해 했던 딸과 아들은, 내가 노력하는 모습에 마음을 열고 도와
주려고 애썼다. 교수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년에 좋은 책을 열권씩만 읽어보라고
조언을 아끼지 않는가 하면 자신도 뒤늦게 공부를 시작해 교수가 되었다면서 학업을
장려하기도 했다. 내가 학교를 다닌다는 걸 알게 된 친구들 역시 나를 응원하고 내 용
기가 대단하다고 부러워했다. 만약 내가 용기를 내지 않았더라면, 나는 여태껏 내 뒤
늦은 학구열을 부끄럽게 여겼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도 없었
을 것이다. 물이 차거나 뜨거워 보인다고 해서 뛰어들지 않고 머뭇거린다면, 평생 수
영을 할 수도 없고 수영의 즐거움도 알 수 없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배우면서 내
식견을 넓히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나처럼 머뭇거리는 후배들에게도 용기를
내서 이 깊이도 온도도 모르는 물로 뛰어들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의외로 자신이 생
각한 것보다 더 빨리, 더 멀리 헤엄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